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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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산] 광릉보다 더 오래 광릉숲을 지켜온 봉선사

  • 작성자관리자
  • 2021-07-02 09: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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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사찰> 광릉숲과 봉선

고려시대 창건된 천년사찰… 왜란·호란과 6·25 와중에도 숲 지켜

숲 가로지르는 왕복 6km 나무 데크길 생겨… 광릉숲이 더 가까워졌다


광릉숲길은 봉선사 입구에서 출발한다.



잦은 전화戰禍와 남벌로 원래 모습을 제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 드문 국내 산림은 인공적으로 재조성된 2차림이 대부분이다. 사람 손 타지 않은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숲을 이 땅에서 찾기가 힘든 이유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사냥터로 사랑받은 포천 일대 숲은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었다. 7대 임금 세조도 이곳을 자주 찾았고, 훗날 광릉으로 이름붙은 무덤에 묻혔다. 광릉숲이 절대보존림으로 560년 동안 제 모습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실의 보호정책이 절대적이었다. 


서울 여의도 면적의 131배(3만8,000여 ha)에 달하는 광릉숲은 세계적으로 온대북부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활엽수 극상림을 이루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218호 장수하늘소는 물론 4,000여 개 분류로 나뉘는 온갖 곤충류가 서식하면서 이를 먹는 새도 187종이나 있다. 이외에도 버섯, 포유류, 양서·파충류, 어류 등 총 6,251여 분류군의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생물이 사는 생물 다양성의 보물창고가 광릉숲이다. 1년에 딱 이틀만 일반인들에게 광릉숲이 개방되는 이유이다.





광릉숲 차도 옆으로 조성된 광릉숲길. 왕복 6km 산책길로 때 묻지 않은 광릉숲의 맑은 공기를 호흡하면서 걸을 수 있다. 원래 서있던 나무들을 다치지 않게 길을 냈다.



용문사 등을 말사로, 경기 북부 최대 사찰


광릉숲을 이루고 있는 남양주 운악산(275m) 자락에 봉선사가 있다. 광릉숲에 가려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봉선사는 광릉보다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용문사, 현등사, 수종사 등  80여 사찰을 말사로 둔 경기 북부 최대 사찰이다. 


고려 광종 20년인 서기 969년에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봉선사는 조선 예종 때 아버지 세조의 명복을 비는 왕실 지정사찰로 중창되면서 이름을 지금의 봉선사로 바꿨다. 조계종 제25교구본사 봉선사는 조선의 7번째 임금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의 무덤인 광릉을 수호하는 사찰이다. 그래서 능침(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사찰로 불린다. 당시 봉선사 중창 불사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한명회, 정현조 등 당대의 권신들이 직접 공사를 감독했다고 한다.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500여 년 전, 정희왕후가 남편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를 중창한 후 심었다고 전해진다. 봉선사와 광릉숲의 500년 세월을 묵묵히 지켜보고 서있다. 


봉선사는 이후 문정왕후 때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되면서 승려가 되기 위한 이들을 뽑는 승과시를 치르는 등 전국의 승려와 신도에 대한 교학 진흥의 중추적 사찰로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수행방법에 따라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는 불교에서 교종은 교리와 경전을 중시하여 이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주력하는 문파를 일컫는다. 




광릉숲 산책길에는 10가지 테마의 아담한 정원이 있다.



끝없는 전란 겪었지만 오뚜기처럼 극


하지만 끝없는 전란은 봉선사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왜란·호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절은 철저하게 파괴됐다. 1.4 후퇴 때 중공군이 봉선사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의 집중폭격 대상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16동 150칸에 이르는 가람이 흔적도 없이 재로 변했다.


다만 큰 법당 앞뒤의 석축이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당시 자취를 짐작하게 할 뿐이다. 지금의 봉선사는 1970년대 당시 주지였던 운허스님 주도로 이뤄진 대대적 중창 불사로 말미암은 것이다.  


봉선사의 역사는 시련의 연속이었지만 그때마다 승려와 불자들은 폐허 속에서 사찰과 숲을 오뚜기처럼 일으켜 세우고 지켜냈다. 임진왜란 당시 봉선사 주지였던 낭혜스님의 이야기도 그중의 하나. 봉선사에 진을 친 왜군은 광릉과 일대의 숲을 훼손했다. 왜군은 퇴각하면서 절과 숲에 불을 질렀고 이때 봉선사는 대부분의 전각을 잃었다. 


낭혜스님은 왜군이 방화를 자행하자 대웅전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독경을 시작했다. 불상과 함께 죽을 각오였던 것이다. 왜군은 독경소리가 그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물러갈 수 밖에 없었다. 낭혜의 의연함이 봉선사와 숲을 살린 것이다.  


광릉숲을 감시하는 것은 수목원 공무원들만이 아니다. 봉선사 스님들 또한 아침저녁으로 포행(승려들이 수행 짬짬이 한가로이 뜰과 숲을 걷는 일)하며 광릉숲을 보살피고 있다. 광릉숲은 수목원과 광릉에 이어 봉선사에서 완성되는 셈이다. 


봉선사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한문으로 된 대웅전 현판 대신 한글로 ‘큰법당’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불교 대중화를 화두로 평생을 정진한 운허스님의 의지가 담긴 현판이다. 운허스님은 경전을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번역하고 국내 최초의 불교사전을 번역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운허 스님은 1964년 동국역경원을 세워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큰법당의 편액과 주련 글씨 또한 한글이다. 



동식물 보호하려 가로등도 안 둬


일주문의 한글 편액은 그 서체를 운허스님의 유고에서 집자했다. 일주문 편액 서체와는 확연히 다른 큰법당 편액 서체는 서예가 운봉 금인석의 작품이다. 큰법당과 바로 뒷건물인 조사전의 한글 주련은 석주스님이 썼다.  


보존을 위해 사람들의 접근을 제한적으로 허용해 왔기에 광릉숲으로의 접근은 쉽지 않았다. 숲으로 가는 길 또한 친절하지 않았다. 좁은 2차선 찻길에 변변한 인도조차 없어 숲을 감상하기보다 오가는 차를 신경써야 했다. 그러던 광릉숲에 지난 2019년 산책길이 났다. 

봉선사 입구에서 출발해 국립수목원 입구까지 3㎞, 왕복 6㎞가 조금 넘는 찻길 옆으로 난 나무데크 길이다. 이 길에는 테마별로 10개의 아담한 정원도 만들어져 난간이 설치된 나무 데크 길을 걸으면서 마음 편히 감상할 수 있다. 나무데크길은 여름에는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 겨울에는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만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동식물들의 휴식을 위해 가로등도 두지 않았다.  


산책길이 워밍업 정도라면 3개시에 걸쳐 총 59km에 달하는 광릉숲 둘레길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포천 구간은 22.5km, 남양주 구간 23.4km, 의정부 구간 13.1km이다. 



  이재진 편집장    사진  이신영 기자
출처  월간 산(http://san.chosun.com/)